(*2023년 7월 31일 내 글에 대한 나의 감상 - 다시 읽으니 정말 특별한 무언가가 되고 싶어하는 자기애적 욕망이 스크린을 뚫고 느껴지는군요. 요즘은 이런 욕망의 노출이 아주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별 것 없는 자신의 과거사에 대한 애정이라고 생각해주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최근에는 나 자신에 대하여 이런 식으로 연민을 엮어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제가 생각한 것보다 저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잘 살고 있고 물론 - 다만- 그래 봤자 무언가입니다.)
청건 작가의 『여자친구』 의 소재 혹은 주인공 한나는 '예쁘고 착하게 생긴 여자애'다.
그래 봤자 예쁘고 착하게 생긴 여자애라는 것. 그 꽃무늬 액자에서 벗어날 희망이 없다는 것.
바로 그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한나는 결심을 내린다.
"죽자!!"
"그래 봤자 무언가"라는 것은 잔인하다.
네가 그래 봤자 여자밖에 더 되는지. 그래 봤자 어리고 예쁘장한 여자밖에 더 되는지.
고등학생 때 나는 야자 시간표를 교묘히 조작하고, 땡땡이를 치고, 수능 전날 피씨방을 가 사이퍼즈를 하고 학교 화단에서 담배를 피웠다. 옆반이 조금 시끄럽다는 이유로 문을 걷어차고 30여명이 우르르 몰려든 가운데에서 일진 여자애와 싸움을 했다. 우리는 서로 가슴크기를 품평하고 친구가 책상에 그린 남성 생식기를 보며 깔깔 웃었다. 그러고도 나는 좋은 대학에 갔다. 내가 논술로 그 대학에 합격한 날 같은 반의 어떤 애는 숨죽여 울었다. 저렇게 살고도 그런 대학에 가는 년. 하지만 나는 내가 꽤나 열심히 공부했다고 생각했다. 합격한 그날 싸지도 비싸지도 않은 중국집에서 마른 딤섬과 너무 신 유린기를 먹었다. 나에게 "지방대나 넣으라, 꼭 너같은 애들이 자존심만 세서 상위 대학교를 넣는다." 라고 한 담임은 내가 문자를 보내자 "너는 될 줄 알았다" 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십 몇년 내내 못생긴 여자애였다. 얼굴엔 여드름이 많았고 눈은 작고 코는 낮았다. 두꺼운 뿔테안경을 쓰고 갈라진 앞머리를 하고 다녔다. 대학에 합격하고 성형외과에 가서 안검하수와 쌍꺼풀 수술을 했다. 힘줄을 묶어서 눈꺼풀이 쳐지지 않게 한다고 했다.
"흥미로운 대학생활이 될 거예요." 의사가 말했다.
정말 흥미로운 대학생활이 되었다. 신입생 때 나는 지금보다 더 몸이 가늘었고 긴 머리에 단정한 치마를 입고 다녔다. 처음 간 동아리에서 어떤 남자애가 "TV에 나오는 사람 아니예요?" 라고 물었다. "요즘은 칭찬 그렇게 해요?" 라고 물었더니 "나는 진심인데." 라고 했다. 그 술자리는 왁자지껄했고 나는 화장실에 가다 창가에서 한국계 미국인 교환학생이 당뇨 주사를 팔뚝에 놓고있는 걸 봤다. 그 교환학생은 슬쩍 웃었다. "마약 아니예요." 그 남학생과 몇 분 대화를 나눴다. 동아리 사람들과 번호를 교환했다. 다음날 문자가 세 통이 왔다. 모두 술자리의 남자들이었다. 나는 그 동아리에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남자애들을 몇 친구로 뒀다. 둘이서만 술을 마시자고 꼬셔댔지만 나는 절대 그러지 않았다. 어느날은 술을 마시고 잔디광장에 누워있었는데 내가 몸을 세울 때마다 남자애들은 몸을 함께 세웠고 누우면 같이 누웠다. 꼭 팔 다리에 우스꽝스러운 인형을 연결해두고 춤을 추는 광대 같았다. 그 동아리의 동아리장이 나에게 반말을 했다. "선배님, 저는 선배님한테 반말하라고 허락한 적 없습니다." 라고 말하고 동아리에서 나갔다. 동아리에 있던 남자애 둘에게 동시에 문자가 왔다. "할 말이 있는데 만날래?" 라고 했고 할 말이 있으면 지금 하라고 하자 답이 없었다. 웃기는 새끼들. 그 남자애 중 하나는 성폭력 혐의로 대자보에 올라갔고 군대를 갔다. 나는 다시는 동아리에 들지 않았다.
나는 영어 과외를 하고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비지니스 미팅 통역일을 했고 교수님들을 쫓아다니며 인정을 받아냈다. 쟤는 능력 좋은 애다. 쟤는 똑똑한 애다. 매번 A를 받았고 트로피처럼 이상한 여자애들을 친구로 만들었다. 자기애가 넘치고 남에게 관심이 없는 무섭게도 지능적인 여자애들. 걔들은 자기만의 세상에서 뛰어놀다가 가끔 나를 아주 허름한 중국식 커피집에 데려가거나 매니악한 프랑스 영화를 보게 했다. 예의 없는 여자애들. 내 부모에게도 인사하지 않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내 서재를 흝던 여자애들. 괴상한 여자애들.
그래 봤자 여자애들.
그 여자애들은 매번 죽으려고 했다. 약을 한 웅큼 먹거나 간이 퉁퉁 부어오를 때까지 술을 마셨다. 나도 그랬다.
그런 일이 몇 번 일어나고 내가 혼자 다니기 시작하자 놀랍게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남자애들은 나를 아주 무서워했다. 싫어하는 것 같았다. 학년이 올라가고 저학번들은 나를 알지만 나는 저학번들을 모르게 되었다. 암암리에 '그 이상하고 예쁜 선배님'으로 소문이 돌다 결국 그 애들도 관심을 끊었다. 걔들은 연애를 하고, 술을 마시고, 학과실 락커에 소주를 쌓아올렸다.
내 친구였던 괴상한 여자애들도 여자친구를 만들었고, 여자친구를 사랑했다.
그래도 그 때 나는 나를 사랑했다. 나를 아주 사랑했고 그걸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그 때 제일 행복했던 것 같다. 똑똑한 척을 하고 다녔을 때. 뭔가 다른 척을 하고 다녔을 때. 이따금 죽으려고 하고 언제나 화가 나있었던 때.
지금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나를 견디는 싸움을 한다. 화를 내지도 않는다. 남을 사랑할 수도 없다. 나는 남자친구도 여자친구도 사랑한 적이 없다. 그 타이틀에 걸맞는 무언가를 갈구하는 이들을 방치하다 지쳐 떠나가게 두었다. 가끔 SF 소설을 읽는다. 그건 아주 다른 세계의 이야기라 신묘한 문장에만 집중할 수 있다. 돈을 벌었다. 훌륭히 인턴을 해냈다. 그 회사에서 여자 직원은 대부분 계약직이었다. 정직원의 80%가 남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미국에서 영화를 찍었다. 거기에서 나는 그냥 어리고 예쁜 동양인 여자애였고 모두가 나를 어리고 예쁜 동양인 여자애 취급을 했다. 그 교실에 있던 미국인 학생들을 전부 누르고 완벽한 학점을 받아냈지만 아무튼 나는 그냥 그런 여자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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